도서 소개
옛이야기를 읽다 보면 우리는 우연히 이 시대에 이 땅에 태어난 게 다행이라 느낄 때가 있다. 적어도 우리 땅 안에서 가보고 싶은 곳은 마음만 먹으면 가볼 수 있고 또 이전에 가봤던 곳도 어렵지 않게 다시 갈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옛사람들 아니 옛 임금님보다도 훨씬 좋은 조건에 있다.
땅은 그 자체의 매력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대개는 그곳에 있었던 사람에 의해 더더욱 의미가 더해지고 급기야 그 사람은 그 땅에 어떤 아우라를 던져주며 풍광을 바꾸어버리기도 한다. 예컨대 경주 동쪽 바닷가는 신라 문무왕이 있었기에 더 빛을 발하며, 해남 진도의 명량(울돌목)은 이순신과 ‘그날의 해전’으로 인하여 특별한 바닷물이 되며 그 흐름조차 예사롭지 않은 소리를 낸다. 그렇기에 우리는 경치를 보러 간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곳에 있었던 옛사람을 만나러 간다고 해도 크게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이전에 경주 김유신 묘를 둘러보고 있었을 때다. 서울에서 왔다는 점잖은 노년 부부가 함께 그곳에 있었는데 갑자기 그 남자분이 들으라는 듯이 푸념을 하였다. 경주는 왜 이리 묘뿐이냐고. 거대한 공동묘지에 다름 아니라고. 나는 겉으로는 웃음으로 동감을 표했으나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면 경주는 왜 왔냐고. 묘지 하나 안 보이는 신도시나 가시지... 당연한 얘기지만 고도(古都)의 여행이란 죽은 자들과 동행하는 길이다. 신라인을 제쳐두고 어찌 경주를 돌아보며 백제 사람들을 제쳐두고 어찌 공주와 부여를 보겠는가.
그리고 땅은 인간에 의해 그 모습이나 역할이 바뀌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땅은 그 자신의 역사를 가지며 그 자신만의 운명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 땅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바꾸어 가며 그 사람들의 역사를 바꾸어 간다. 그리고 그 땅을 구경하고 느끼는 우리 역시 결코 예전의 우리가 아니다. 그뿐 아니다. 죽은 자들 역시 예전의 그 죽은 자가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새로이 드러내고 다른 얘기를 들려준다. 예컨대 그리도 오랫동안 향락과 방탕으로 나라를 잃었다던 의자왕은 이제야 서기 660년 그날 웅진에서의 그 참담하고 억울했던 사건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삼천궁녀가 몸을 던지기엔 아무리 보아도 너무 좁았던 낙화암은 이제야 망국의 상징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기에 새로운 곳을 가는 여행의 재미도 있지만 같은 곳을 가고 또 가는 재미도 있다. 비유컨대 새로운 여러 사람을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몇몇 사람을 깊이 만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미지의 경치를 찾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익숙한 경치의 숨겨진 민낯도 볼만한 일이 된다.
이 책은 우리 땅과 함께 한때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벌였던 그 사건에 대해 필자가 오랫동안 생각하고 새롭게 느낀 점을 정리해 본 글이다. 2022년 여름, 더위와 막판 작업이 한꺼번에 몰려오며 너무 힘들었다. 여행이 주던 ‘느낌’이나 ‘재미’는, 그것을 글로 나타내는 ‘작업’과는 완전히 별개였다. 점잖지 않아서는 결코 안 될 나이에 한밤에 괴성까지 질러댔다. ‘안 하면 그만인 일’ 혹은 ‘안 해도 되는 일’을 왜 사서 고생하는지 스스로 한심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 일과 얽힌 여러 사람들에게 심하게 폐 끼치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는 아직도 이 땅에서는 벼슬이기도 한 ‘나이 먹은 자’의 분명한 병통에 속한다.
조선 숙종 영조 연간,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던 신유한(申維翰)은 7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내 평생 시서(詩書)와 문장에 힘쓰며 살았지만 북으로 중국에 가서 사마천(司馬遷)의 옛터를 보지 못하였으니 운명이로구나’하며 애통해하였다. 젊어서부터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대과 회시(會試)에서 장원급제까지 하였으며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오며 『해유록(海遊錄)』이라는 당대의 베스트셀러 작가에다 그 격심한 당쟁 속에서도 별 험한 꼴 보지 않고 천수를 누렸지만 그는 평생을 스스로 불우하다 여겼고 자신의 인생을 슬퍼하였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채워지지 않은 출세에의 갈망이었다. 시골의 지극히 한미한 집안 출신에다 외가의 서얼 핏줄이 관련되어 내내 승진의 발목을 잡았다. 물론 당시로선 결정적인 흠이었다. 그럼에도 서얼허통(庶孽許通)이라는 시대적인 혜택을 받아 과거에 응시하는 행운을 누렸지만 실상 그런 것은 금방 잊혀지기 마련이다. 과거시험 동기(이때는 同榜이라 하였다)들은 한창 참판(지금의 차관)의 벼슬을 지나고 있는데도 나이 60이 되어서 시골 수령을 전전하는 신세가 그의 자존심을 죽을 때까지 건드렸다. 젊어서 서울 남산에 올라 도성 안을 내려다보며 ‘이곳 서울 출신은 저렇게나 잘 나가는데’라고 하며 ‘시골 출신의 비애’를 한탄하였고 ‘세 명의 임금을 섬기면서 그저 미관말직이니, 책을 만권 읽었다 한들 다만 속을 끓일 뿐이네’라 하였다. 그 안타까움에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도무지 자족(自足)함이 없었다.
내가 볼 때 그의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은 이른바 ‘잘 나갔던 왕년’이다. 자신의 시문에서 장원급제자로 자칭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며 그에 대해 ‘까다롭다’ ‘거칠다’는 평이 많았던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젊은 시절 한때의 큰 영광은 자칫 후일 인생의 독이 되기 쉽다. 물론 그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도 본인이 남들보다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 불행을 끼고 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또 그 점을 병통으로 여겼다. 그리고 깊이 궁구한 끝에 그 원인을 찾았으니 그가 내린 결론은 바로 ‘문장’ 그 자체였다. 문장액운진(文章厄運臻), 바로 그 문장이라는 것이 액운을 부르는 것이라고. 예나 지금이나 너무 뛰어난 글재주나 문장은 액운과 연관이 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어찌 꼭 문장에만 한정되랴. 돈이든 명예든 출세든 애정이든 무언가에 도를 넘는 집착은 결국 액운을 부르기 마련이다.
나는 요즘도 그 잘난 또 한편으론 참 못나기도 한 신유한을 만나러 그가 59세 나이에 울분을 누르고 현감 노릇을 시작하던 경기도 연천을 가고 또 간다. 그 땅엔 그가 그나마 낙으로 삼고 견디었던 미수 허목(許穆) 선생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혹 진주 촉석루에 가면 또 할 일이 생겼다. 2층 남쪽 기둥에 쓰인 8개의 주련(柱聯)이 당시 문인들의 인구에 회자되던 그의 시구절이라니 말이다. 이제껏 몇 번이나 들렀던 촉석루를 또다시 세세히 살펴야 할 이유가 생겨났다. 이것도 여행의 재미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다.
2022년 8월
유창영
목차
머리말
1. 남원
광한루
이도령 몽룡(夢龍)의 정체
죽은 이와의 사랑
남원성 전투
만인의총(萬人義塚)
오늘이 오늘이소서
최제우, 칼춤을 추다
유자광을 찾아서
운봉과 바래봉 철쭉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
동편제와 가왕(歌王) 송흥록
국악의 성지와 옥보고
흥부전의 고향
변강쇠와 옹녀
2. 부산
용두산 공원과 부산탑
해운대
조선팔경(朝鮮八景)과 해운대
영도(影島)
태종대
윤심덕과 <사의 찬미>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
왜 우리는? 자살의 문제
영도다리
사십 계단과 국제시장
점바치 골목
부산역에서
감천 문화마을
동래성 전투와 송상현
3. 부여
백제 성왕
백제와 고구려
공주에서 부여로
성왕의 죽음
위덕왕(威德王)
성왕 후기(後記)
일본 젠코지(善光寺)
무왕과 서동, 사실과 설화 사이
의자왕
대야성 전투,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계백 장군과 5천 결사대
백제 멸망과 의자왕의 행적
예식진이라는 인물
의자왕의 최후와 북망산
북망산(北邙山)을 생각하며
능산리를 가다
낙화암과 고란사
4. 강릉
헌화로와 수로부인
경포대
신사임당. 사임(師任)이란 무엇인가
신사임당과 이율곡
평창 판관대
판관대와 메밀꽃 필 무렵
사임당, 그 후
초당 마을과 허엽
허난설헌
난설헌, 그 후
허난설헌과 두목지
난설헌의 또 다른 문제 - 표절
허균이라는 인물
허균의 마지막
강릉 사천진(沙川津)에서
5. 연천
백만 불짜리 데이트
신라 경순왕 묘
개성 왕씨의 비극
고려 종묘 숭의전의 탄생
조선 최고의 역전인생(逆轉人生)
연천의 신선, 미수 허목
연강(漣江) 나룻길에서
서산군 이혜
허목과 양녕대군
연천과 신유한(申維翰)
신유한, 연천에 오다
임술년 7월 보름밤 연천에서
신유한, 말년에 들다
6. 경주
김춘추
김유신
천관녀 이야기
서악서원
문무왕과 대왕릉
웅진 취리산(就利山)의 회맹
나당전쟁
대왕릉과 감은사 그리고 문무대왕비
동궁과 월지
월정교와 문천교
월정교를 건너다
경주의 석양
경주 남산의 비극
경순왕과 마의태자
7. 진도
이순신, 명량에 오다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명량해전 후기
삼별초, 진도에 오다
승화후 왕온
주인을 무는 개
유배객들이 몰려오다
윤필상과 이목
노수신의 경우
하루의 일과는 이렇게 하라
독서하는 종자가 끊이지 않게 하라
쏟아진 사약
운림산방(雲林山房)을 가다
죽음과 신나는 장례식
8. 서울
고려 현종, 왕순
왕순, 진관사에 오다
압구정과 기심(機心)
기계와 사람
강남 선정릉의 비극
삼전도(三田渡)비(碑)의 전말
이경석이라는 사람
수이강(壽而康), 이경석과 송시열
봉황과 올빼미
삼전도비의 유랑
인왕산의 어제와 오늘
인왕산 호랑이
단경왕후와 거창군 부인
안동 김씨의 터전 ‘장동’
관악산과 채제공
9. 함양
최치원과 천령 상림(上林)
조병갑(趙秉甲)이라는 사람
학사루(學士樓)와 김종직
조의제문과 무오사화
연산군과 김일손. 얼굴을 맞대다
왕조실록과 사관
김종직의 문제
지리산과 김종직
마음을 쓰는 자와 몸을 쓰는 자
일두(一蠹) 정여창
일두라는 호
정여창과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을 만나다
정여창과 지리산
안의(安義)라는 곳
안의와 연암 박지원
10. 단양
죽령(竹嶺)
도담삼봉
이성계와 정도전
정도전, 그의 흔적을 찾아서
사인암(舍人巖)으로
역동 선생 우탁
독립불구 돈세무민
도끼상소(지부상소, 持斧上疏)
우현보와 이방원
퇴계와 두향
신라 적성비의 발견
영춘에서 온달을 만나다
단양을 내려다보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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